AI 시대의 슈퍼 을(乙), 세계 1등 찍은 한미반도체가 증명한 기술 독립의 가치

서울 올림픽대로를 지나다 보면 63빌딩 인근에 우뚝 선 거대한 옥외 광고판을 마주하게 된다. 그곳에는 화려한 수식어 없이 '한미반도체, Since 1980'이라는 문구만 적혀 있다. 일반 대중에게는 낯설 수 있지만, 글로벌 반도체 업계에서 이 이름은 네덜란드의 ASML...

서울 올림픽대로를 지나다 보면 63빌딩 인근에 우뚝 선 거대한 옥외 광고판을 마주하게 된다. 그곳에는 화려한 수식어 없이 '한미반도체, Since 1980'이라는 문구만 적혀 있다.일반 대중에게는 낯설 수 있지만, 글로벌 반도체 업계에서 이 이름은 네덜란드의 ASML에 비견되는 한국의 '슈퍼 을(乙)'로 통한다. 인공지능(AI) 시대의 총아로 불리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의 핵심 열쇠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불모지에서 피어난 '소부장' 국산화의 꿈

한미반도체의 역사는 1980년, 곽노권 창업주가 차고지에서 '한미금형'을 설립하며 시작됐다. 당시 한국 반도체 산업은 미국과 일본에서 장비를 수입해 단순 조립만 하던 하청 기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독립운동가 곽소진 선생의 손자이기도 한 곽 회장은 "우리 손으로 반도체 장비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철학으로 국산화에 뛰어들었다.초기에는 반도체 패키지 외형을 만드는 몰딩용 금형(캐비티바) 부품 제작부터 시작해, 1997년 혁신적인 '소잉 앤 플레이스먼트(Sawing & Placement)' 장비를 내놓으며 업계의 판도를 바꿨다. 웨이퍼를 자르고 검사하는 여러 공정을 하나의 장비로 통합한 이 기술은 경쟁사 대비 30% 이상의 생산성 향상을 입증하며 한미반도체의 글로벌 진출을 견인했다. 특히, 2004년부터 21년 연속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는 '마이크로 쏘 비전 플레이스먼트'는 2021년 일본이 독점하던 핵심 부품(쏘)까지 국산화하며 완전한 기술 독립을 이뤄냈다.

무어의 법칙 한계, '후공정(패키징)'이 대안으로 떠오르다

최근 한미반도체가 자본 시장과 IT 업계의 압도적 주목을 받는 이유는 반도체 산업의 기술 패러다임 변화와 직결된다. 수십 년간 반도체 산업은 웨이퍼에 더 얇고 미세한 회로를 그리는 '전공정(미세화)' 경쟁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노미터 단위의 물리적 한계에 부딪히며 미세화 속도가 둔화하자, 칩을 위로 쌓고 옆으로 이어 붙여 성능을 극대화하는 '후공정(Advanced Packaging)'으로 시선이 쏠렸다.엔비디아 GPU의 핵심 파트너인 HBM(고대역폭메모리)이 대표적인 사례다. HBM은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관통해 쌓아 올려 데이터 처리 속도를 혁신적으로 높인 메모리다. 문제는 이 초미세 D램 칩들을 열과 압력을 가해 오차 없이 수직으로 접합(본딩)하는 고난도 작업이다. 고층 건물을 지을 때 층마다 다른 하중과 압력을 정밀하게 계산해야 하듯, 8단·12단·16단으로 칩을 쌓을 때마다 각기 다른 데이터와 온도를 제어해야 한다.

'TC 본더' 세계 1위, 대체 불가능한 기술적 해자

바로 이 접합 공정에서 세계 최고 기술력을 자랑하는 장비가 한미반도체의 'TC 본더(열압착 본더)'다. 2016년 곽동신 현 회장의 주도하에 개발된 이 장비는 현재 글로벌 시장 점유율 7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오랜 기간 축적된 압도적인 데이터와 생산 속도 차이로 인해, 경쟁사들이 섣불리 공정 설계를 변경하거나 추격하기 어려운 강력한 '기술적 해자(Moat)'를 구축했다.이러한 기술적 자신감은 2011년 삼성전자 자회사(세메스)와의 특허 침해 소송에서도 드러났다. 당시 거대 고객사인 삼성과의 결별을 감수하면서까지 기술 보호를 위해 승부수를 띄웠고, 결국 승소하며 독자적 노선을 걸었다. 최근 HBM 수요 폭발로 SK하이닉스뿐만 아니라 마이크론 테크놀로지 등 글로벌 메모리 제조사들로 공급망을 다변화하며 '슈퍼 을'의 입지를 굳히고 있으며, 업계 일각에서는 삼성전자와의 협력 재개 가능성까지 관측되고 있다.

결론 및 전망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욜 디벨롭먼트(Yole Développement) 등 주요 IT 리서치 기관들의 추정에 따르면, 글로벌 첨단 반도체 패키징 시장은 향후 5년간 연평균 10% 이상의 고성장이 수학적으로 매우 유력하다. AI 인프라 고도화에 따라 HBM5, HBM6 등 차세대 메모리 개발 경쟁이 격화될수록 정밀 접합 장비의 수요는 우상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한미반도체의 궤적은 단기 실적이나 유행에 영합하지 않고, 수십 년간 묵묵히 기초 기술(Core Tech)에 투자해 온 소부장 기업이 맞이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보상이다. 이들의 성공은 여전히 해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 반도체 생태계에 '진정한 초격차는 흔들리지 않는 원천 기술에서 나온다'는 묵직한 교훈을 던지고 있다.